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이 14세 (문단 편집) === 어린 시절과 프롱드의 난 ===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LouisXIV-child.jpg|width=100%]]}}}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external/4.bp.blogspot.com/Louis_XIV_1648_Henri_Testelin.jpg|width=100%]]}}}|| || 어린 시절 || 10세 때의 루이 14세 || 부모인 [[루이 13세]]와 스페인 출신의 [[안 도트리슈|아나]](Ana de Austria)[* [[프랑스어]]: Anne d'Autriche(안 도트리슈).]가 결혼한 지 23년 만에 극적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루이 14세의 탄생은 국가적 축복을 받았지만 그의 어린 시절은 불행 그 자체였다. 특히 자식들에 대한 기대가 지나쳤던 [[루이 13세]]는 자식들한테 애정도 주지 않으면서 세 살배기에 불과한 아들 루이 14세가 제대로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정없이 매질하는 모진 아버지였다. 그러던 루이 13세가 1643년에 급서하면서 5세가 채 되기 전에 즉위했고, 어머니 안이 [[섭정]]을 했으나 대부분의 국사는 [[추기경]]이자 재상인 [[쥘 마자랭]][* [[리슐리외 추기경]]의 후임자]이 1661년까지 맡았다. 즉, 23세에 [[친정#s-2]]을 시작한 것이다.[* 사실 명목상으로는 루이가 13세에 달하고 어머니 안이 섭정직에서 물러난 1651년부터 친정이 시작되었지만, 이후에도 마자랭이 사망한 1661년까지는 마자랭의 영향력이 컸다.]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lois.ivx.young.jpg|width=100%]]}}} || 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lois.ivx.younger.jpg|width=100%]]}}} || || 제우스로 분장한 루이 || 1654년의 루이[* 루이 14세 스스로가 가장 좋아했던 그림. 왼손에 들고 있는 손이 달린 막대는 국왕의 종교적 권위 그리고 사법적 권력을 나타내는 '''정의의 손'''이며, 훗날 [[나폴레옹 보나파르트]]가 [[프랑스 제1제국]]의 [[황제]]로 즉위하면서 남긴 초상화(앵그르의 작품)에도 이것이 등장한다.] || 1648년, 마자랭은 오만하게도 스페인에게 [[카탈루냐]]와 [[스페인령 네덜란드]]의 교환을 요구했다. 이 요구는 프랑스의 동맹국 [[네덜란드 공화국|네덜란드]]에게 충격을 주었고 네덜란드는 스페인과 단독강화를 맺었다. 결국 프랑스는 스페인과의 전쟁을 끝내지 못한 채 11년간 전쟁을 더 이어갔다. 전쟁 지속을 위해 마자랭은 세금을 늘리려 했으나 이는 큰 반발을 불러왔고 결국 '''1차 프롱드의 난'''이 터졌으나 마자랭은 '''[[루이 2세 드 부르봉콩데|대 콩데(Grand Condé)]]'''의 도움으로 반란을 진압하였다. 그러나 대 콩데와 마자랭 모두 굉장히 오만한 사람들이었고, 마자랭에게 반발하여 대 콩데가 반란을 일으켰는데, 이를 '''2차 프롱드의 난'''이라고 한다. 대 콩데는 뛰어난 군사적 자질을 가지고 있었고 한때 프랑스의 주인이 될 수도 있었으나 오만한 성격으로 민심을 잃고 또 다른 [[명장]]인 '''튀렌 자작''' [[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]]와의 전투에서 일진일퇴를 거두다가 민심이 멀어져 병력이 계속 줄어들자 튀렌에게 패하고 [[스페인 제국|스페인]]으로 망명했다. 프롱드 중에 2차 프롱드의 난은 프랑스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. [[파리(프랑스)|파리]] 인구의 3분의 2가 사망했고, 영향을 받은 지역민의 25%가 죽었다.[* David Parrott, 1652(2020)] 하필 [[소빙기]]가 가장 심할 때 터진 반란으로 인해 프랑스는 대타격을 입었고 1652년부터 스페인에게 밀리기 시작했다. 다행히 [[잉글랜드 왕국|잉글랜드]]의 도움으로 프랑스는 간신히 [[플랑드르]]에서 우세를 점했으나 [[이탈리아 반도]]에서 스페인에게 밀리자 프랑스나 스페인이나 전쟁에 너무 지쳐 있는 상태였고 결국 피레네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. 1648년 [[베스트팔렌 조약]]과 1659년 피레네 조약은 과거에는 '''"프랑스의 패권이 시작되고, 스페인의 몰락을 보여준다."'''고 여겨졌지만 현재 학자들은 이러한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. 프랑스는 프롱드로 너무나 큰 피해를 입었고 국가가 초토화되었다. 이것은 루이 14세의 친정 이전까지 왕의 권위를 비참할 정도로 추락시켰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